
얼마전부터 인터넷우체국 사이트에 접속하면 비밀번호를 입력할 때 가상키보드가 뜬다. 화면상에 보이는 그림 키보드에서 비밀번호 문자열을 클릭하여 입력해야하는걸 강제한다. 사용자가 가상키보드를 닫을 수도 없다.
왜 가상키보드를 강제하느냐. 사용자의 PC에 키보드 입력을 가로채는 해킹 프로그램이 깔려있고 사용자가 누르는 키보드의 키가 가로채져서 전송되고 있다고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키를 누르는것보다 키 배열이 매번 바뀌는 키보드 그림을 그려주고 여기를 마우스로 왔다갔다 지나다니면서 한번씩 누르면 어느 키(어느 비밀번호 문자)가 눌렸는지를 해킹 프로그램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하…… 이걸로 보안 강화되는거면 구글이니 페북이니 네이버니 테슬라니 연매출 수백조인 회사의 서비스에서는 왜 로그인 화면에 가상키보드를 안쓰는 것일까? 나는 그저 인터넷 우체국 들어가서 미리 작성해 둔 pdf 문서 파일 올려서 우편발송만 하면 되는데 이게 이렇게까지 사람을 귀찮게 할 일인가 싶다.
저 가상키보드의 단점은, 비밀번호 관리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인터넷우체국의 비밀번호를 Yf&Tl%Vecx9OCyZ! 처럼 지정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이건 매우 강력한 비밀번호이다. 추측할수도, 무작위 대입해서 뚫을 수도 없는 비밀번호이다. 외울 수도 없는 비밀번호이기 때문에 비번관리프로그램을 이용해서 자동으로 입력하게 하는데 저 가상키보드는 그 과정을 차단시켰다. 수동으로 복사 & 붙이기를 해도 입력되지 않는다. (물론 꼼수는 있으나, 굳이 여기서 말해서 막히게 하고 싶진 않다.) 그렇다보니 이러한 가상키보드의 단점은 사람들로 하여금 외울수 있고 타이핑할 수 있는 비밀번호를 사실상 강제하는 것이다. Yf&Tl%Vecx9OCyZ! 대신 apple123! 라든가 password72@ 같은 비번 말이다. 보안을 위해 정기적으로 비밀번호를 바꾸라고 하면 우린 또 무슨 새로운 비번을 지정해서 그걸 외워야하나? 외우기 힘든 비번이라면 메모지에 비밀번호를 적어서 모니터에 붙여두거나 키보드 아래에 둔다. 누가 “가상키보드를 도입하면 보안이 강화됩니다”라고 설득했는지 모르겠으나 그로 인한 부작용이 더 크지 않다고 입증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백번 양보해서 기본값으로 가상키보드를 켜고, 사용자 책임하게 가상키보드를 끄게 하면 안되었을까? 패스키를 도입할 수는 없었을까? 의심스러운 로그인이 감지되면 그때 2단계인증을 요구할 수는 없었을까? 로그인을 이메일 주소로 하고 사용자가 입력하면 로그인할 수 있는 무작위로 생성된 URL을 메일로 보내 클릭하게 할 수도 있다. 모든 고객의 컴퓨터에 악성코드가 설치되어 키보드입력이 해킹당하고 있다고 확신하면 아예 저 가상키보드를 반투명하게 만들고 3초마다 한번씩 화면 여기저기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이동하게 만들지 그러나.
세상 수천만개일지 수억개일지 모를, 그 많은 웹사이트, 로그인 기반 서비스들에게는 사용자의 컴퓨터가 키로그 툴로 인해 입은 피해에 대해 보상할 책임이 없는데 왜 우체국은 이렇게 키보드를 만들어 놨나 모르겠다.
참으로 불편하고 또 불편한 서비스 UI이다.
[업데이트]@2월27일
어제 밤에 확인해보니 가상키보드가 없어졌다. 다행이다. 우리는 뭔가 일을 할 때, 이게 실제로 필요하고 실제로 동작하는지, 문제해결 방식에 부합하는지 (아니, 그러한 문제가 실제로 존재하는지부터 먼저 확인), 선의의 고객이 감수할 불편함보다 압도적인 이익이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사실 월급쟁이들이 그런 주장을 하긴 쉽지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