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나도 식혜맛을 안다.

By | 2005-07-01

동네 시장에 보면 직접 만들었는지 아니면 어디서 띠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1.5리터짜리 식혜를 팔곤 한다. 캔에 들은 식혜와는 다르게 엿기름향이 제법 나는것이 그럭저럭 옛날에 할머니가 만들어주시던 그 맛과 비슷하기때문에 가끔 사마시는데.
장마비가 많이 올꺼라고 하더니만 하루종일 해 쨍쨍에 푹푹 찌던 오늘, 퇴근길에 동네 시장을 가로질러 오다가 식혜를 파는 가게앞을 지나게 되었다. 푸른 꽃무늬 가득한 커다란 아이스박스에는 얼음 반, 물 반이었고 그 안에 두둥실 잠겨있는 식혜 PET병은 어린시절 유원지입구 리어카의 투명한 플라스틱 통안에서 하릴없이 곤두박질치던 – 보리차에 설탕 섞은 – 냉차통을 보던 아이처럼 처음엔 시선을 고정하게 만들고 이어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주인아저씨가 물 속에서 식혜병을 꺼낼때 이미 알아봤어야 했다. 식혜병의 중간쯤부터 아래쪽으로 원래 식혜의 색인 뽀얀 반투명의 흰색이 아니라 마치 수정과가 가라앉은것처럼 짙은 색이었으니, 여태까지 보아왔던 식혜라는 음식을 머리속에 차르르륵 되돌려보았으나 이런색은 본적이 없었으므로 본능적으로 이상징후를 감지했다. “언제까지 먹을수 있어요?”라고 물어보았다. 원래는 “언제 만든거예요?”가 명확한 질문이겠으나 인상좋은 주인아저씨에게 나도 모르게 호감의 법칙*1에 빠져들고 만 셈이다. 아저씨는 냉장고, 특히 김치냉장고에 두면 오래두고 먹을수 있다고 하며 비닐봉지에 식혜병을 담아 주었다.
휘적휘적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한 컵 따라 마셨는데 새콤한 맛이 살짝 느껴졌다. 같이 드시던 할머님께서도 “맛이 갔네” 하시면서 더이상 안 드셨는데, 대부분 어르신들이 그러하듯 “음식의 상한정도에 대한 관용도”가 상당히 높으신 편이라 이 정도의 판정은 매우 드문 경우다.
바지만 대충 츄리닝으로 갈아 입은 다음 식혜를 싸들고 다시 가서 맛이 갔다고 말하고 식혜를 내밀었다. 아저씨는 별다른 표정 변화없이 컵에 따라서 한모금 마셔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식혜 맛이 원래 이렇지 뭐”
노곤한 목소리는 왼쪽귀로 들어가서 오른쪽 귀로 나온다음 접시춤을 추고 다시 오른쪽 귀로 들어가서 왼쪽귀로 나와서 토끼춤을 추길 반복하며 내 뇌를 참을수 없게 간지럽힌다. 식혜 맛이..원래..이래…? 그런데 난 왜 여태 이런 시큼한 식혜는 처음 먹어본걸까… 5초쯤 정적이 흘렀나. 뭐라도 말을 해야할것 같아 입술을 옴죽거리는 찰라 아저씨는 “냅둬. 내가 먹게” 라며 돈을 쑥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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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입관, 편견은 경험이 알려주는 직관과 다르다. 개가 엉거주춤 앉아있고 똥구멍에서 누렇고 거무튀튀한 덩어리가 나오고 있다면 직관적으로 개똥임을 알수 있어야 한다. 그런 경우에 그게 개똥이 아닌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끔 자신의 환상과 상상력이 인도하는대로 현실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1. 설득의 심리학 -로버트 치알디니 –
p.237 매력적인 피의자들의 무죄선고율이 그렇지 않은 피의자들의 그것보다 2배나 높았다. (…) 우린 잘생긴 사람은 으레 능력있고 친절하고 정직하며 머리가 영리할 것으로 연상한다고 한다.

2 thoughts on “미안하다. 나도 식혜맛을 안다.

  1. lunamoth

    사는 게 그렇지 뭐. 그까이꺼 스타일 이군요 그분.
    불경스럽게도 대략의 반전을 예상하고 꽤 즐거워 했답니다. 용서하시길.;;

  2. 타코야끼

    흐흐…왠지 장면장면이 연상되네요.^_^
    참..이건 사족인데요.
    그렇게 맛이 약간 간 식혜에다가 소다를 조금 넣고 팔팔 끓이시면 다시 원상태의 맛으로 돌아온답니다. 물론 ‘약간’ 갔을 때의 이야기지만요.
    여하간…아저씨…참..장삿속이라고는 하지만..
    그런거 파시다가 사먹은 사람 잘못되면 어쩌시려구…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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