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티즌”은 밤의 주둥아리라는 네거티브한 용어로 묶이기도 하고 한편으로 네티즌과 일반대중을 분리하려는저의에 대한 의구심을 낳기도 한다.
네티즌은 과연 “시민 일반”과 어떤점에서 다르고 만약 다르다면 왜 다른가.
시민과 네티즌을 구분하는 지점은 인터넷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계층인가 아닌가이다. 시민이 인터넷을 사용하는 순간 그 시민을 네티즌이라 부르긴 하지만 네트에 올라앉는 순간 기존의 시민들의 행동방식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특정한 상황에서 대단한 행동의 확산성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대부분 논의의 확산성이나 심도와는 상관이 없이 이루어진다. 네티즌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흔한 방아쇠는 우선 “애국심”이다. “빨리 가서 투표해주세요”라는 한마디에 수만,수십만명이 클릭을 해서 투표결과를 하루아침에 뒤바꿔버리는 일은 흔하다.
두번째 방아쇠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원군으로서의 역할을 요청받았을때이다. 어린아이가 아픈데 집안사정이 어렵다던지, 장애인이 누구에게 맞았다던지, 무슨 강남의 유명헤어샵에서 머리다듬다가 귀가 잘렸다든지, 놀이공원에서 아르바이트하다가 크게 다쳤는데 쉬쉬했다든지 하는 글들은 정의로움이라는 동력을 이용해서 부지런히 각 게시판과 메신저로 퍼날라진다.
이 것은 워낙 “시급하고도 중요한 일”이기때문에 종종 진실여부를 판단하는 단계를 생략함으로써 어이없는 해프닝을 만들어내기도 하는데 김동성,오노 재투표가 대표적인 예가 될것이다. -_-;;
애국심과 약자에 대한 정의로움이 가득한 이 사람들은 네트에서 그들이 행동하는 방법과 얼마나 일치하게 땅위에서의 삶을 살고 있을까. 그 들이 불의에 분노하고 시간을 내어 행하는 이 수고스러움은 네트에 올라타기 이전부터 갖고 있던 성품인것일까.
살펴본바로는 “옳다”와 “그르다”를 판단하기보다는 “좋다”와 “싫다” 그리고 나와 “같다”와 “다르다”의 수준에서 행동하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옳지만 나와 관계없다고 여겨지는 것을. 예를 들자면 장애인이동권확보를 위한 서명운동의 온라인서명은 3년동안 5000명남짓이 서명했다. 천일이라고 치면 하루 다섯개의 서명인 셈이다. 그러면 하룻밤새 또는 며칠만에 수십만개의 코멘트가 퍼부어지는 일이 대체 왜 이런 서명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까.
첫째, 네트상에서 발휘했던 의협심을 현실에서 증명해보여야할 책임 여부.
장애인이동권을 확보하는데 동의를 했다면 이동권의 제약을 타파하기 위한 현실에서의 투쟁은 차치하고서라도 휠체어를 탄 분의 계단이동을 돕는다던지, 지하철에서의 자리를 양보한다던지, 시각장애가 있으신 분들의 대중교통 승차를 돕는다던지의 일을 해보여야할텐데, 그것은 싫다는 것이다. 네트에서의 나의 행동이 현실에서의 나의 피곤함과 땀을 요구한다면, 그 둘사이의 괴리에서 양심의 갈등을 느낀다면, 차라리 현실에서 “눈한번 질끈감음”으로써 문제를 외면함으로써의 해결책을 찾는 것이다. 립씽크 가수를 비난하는 일은 현실에서 할일이 별로 없고 어느 미용실에서 손님이 귀가 잘렸다면 그 미용실에 안가거나 그동네 갈때 창밖에서 유리창을 통해 “모든걸 다 안다”는 눈빛을 한번 날려주는 응징말고는 또 할일이 별로 없다.
둘째, 네트상에서 했던 행동이 현실에서 나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고, 다수속에 숨을수도 없으며 상대방이 물리적인 폭력을 휘두를 가능성이 있거나 권력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면 이 “네티즌의 힘”을 기대하지 않는것이 좋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립씽크가수,미용실직원,놀이동산의 공통점은 대문두드리며 “아무개씨 집 맞습니까? 문열어보세요!” 라고 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셋째, 가치판단에 얼만큼의 노력이 필요한가.
“아무개가 얻어맞았답니다.”, “아무개가 다쳤답니다.” , “우리나라가 투표에서 밀리고 있습니다.”, “아무개 어린이의 생명이 위독합니다.” 등의 사안은 “맞은놈 불쌍한놈, 때린새끼 씹새끼”, “다친알바 불쌍한놈, 놀이동산 씹새끼”, “귀짤린놈 불쌍한놈, 배째라하는 미용실 좆같네”의 판결문이 바로 머리속에서 써진다. 그러나 즉각적으로 무슨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해서는 판단의 근거자료들을 수집하기보다는 포기하거나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기본적으로 정의심만을 동력으로 삼기엔 부족함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넷째. 실제로 공격당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은 처참해야 한다.
이 것은 일종의 놀이다. 만두파동때 한 업체의 웹사이트를 조졌다고 치자. 그곳이 로그인이 필요없는 자유게시판이라면 그 회사 사이트는 개박살난다. 그러나 “관리자에게 메일보내기”라는 양식만 있었다면 자유게시판에 올라왔을만큼의 글이 그 관리자에게 메일로 보내졌을까? 추측컨데 1/10 만큼이라도 항의메일도 받기 어려웠을것이다. 왜냐하면 수만, 수십만명의 아군과 지원군들이 이미 초토화를 시켜놨거나 또는 그렇게 하는 과정중에 자신이 그 전투에 동참하고 그 폐허가 된 모습을 즐길수 있기 떄문이다. 성전에 참가한 사람들은 볼수 없지만 그사람들이 남긴 흔적이 가득한 전장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패거리” 속에서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확인하는것은 뿌듯한 일이다. 현실에서의 나는 나약한 존재지만 “우리가 함께할때 두려운것은 없었다”쯤 되겠다.
시민과 네티즌의 행동방식이 위와 모두 일치하진 않아도 얼추 맞아떨어지는 것이 있을것이다. 네트밖에서도 네트안에서도 여전히 용감하고 일관성이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네트속에서 완전히 변신을 하는 사람도 있다. 가끔 이렇게 네트의 힘을 빌은 “무리속에 끼어 돌한번 던지기”는 현실에서 치열하지 못하고, 도덕적이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한 자신의 불만족을 해결하는 당의정일지도 모른다.
말씀하신 온라인에서의 행동들, 저도 너무 싫어요. 휩쓸리지 않으려 애쓰고 있죠. (귀얇은 jely -_-;;;)
하지만 사실 오프라인에서도 똑같이 행동을 하곤 합니다. 온라인에서는 행동하기가 보다 쉬울 뿐이죠.
“네티즌”이라는 단어 때문에 언론플레이의 도구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라고 호찬님이 말씀하시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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