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간다는 것은 반복되는 만남과 이별에 적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별이 언제나 나쁜것은 아니다. 그것은 만남만큼의 횟수만큼 반복되어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별은 사실 받아들일 수 있다. 다만 추억을 곱씹어야한다는 사실이 힘든것이다. 예를 들어 추억이 전혀 없거나 무시할 수 있을만큼 뿐이었다면 이별은 아파할 추억이 없는만큼 더 쉬울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냉소적이거나 또는 용감무쌍한 영혼이라할지라도 문득 떠오르는 또 떠올리는 추억속에서 눈빛이 흔들리지 않기란 보기보다 쉽지 않다. 그 추억속에서 행복했던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은 지독한 두통과도 같은 것인데. 뜨거운 냄비를 집고 펄쩍 놀라듯 그것은 집지만 않는다면, 즉 추억속의 나와 지금의 나를 강제로 거리를 두고 있다면, 크게 데이는 일은 없을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적인 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로지 내가 얼마나 개입했었고 그 상황이 얼마나 나에게 강하게 인식되어있느냐에만 상관이 있어보인다.
벽에 붙어 기어오르는 담쟁이류의 식물이 바짝말라붙은채로 한해살이 풀의 일생을 마친것을 본다. 벽의 거친 표면을 움켜쥐듯 죽어버린 그 껍데기의 형상은 어느정도 사람이 추억을 바라보는 시선을 닮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조금 더 침착해져야한다. 그것이 덜 다치는 비결이라는 것을 안다.